퇴계는 가마를 타고 소백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서구적 등반관념으로 본다면 비난 받을 행동이다. 하지만 퇴계 이황은 소백산을 관할하는 풍기군수였음에도 수십 명의 관비나 백성을 동원해 화려한 산행원정대를 꾸리지 않았다. 퇴계는 , 즉 소백산 산행기를 담은 책을 남겼다. 퇴계 스스로 ‘어릴 적부터 영주와 풍기를 자주 왕래하였으며,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보이고, 발만 옮기면 올라갈 수 있는 곳이지만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하고 가보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고 했을 만큼 애정 깊은 산이었다.15
‘산 은 모두 석봉이며 절정은 2,300丈으로 시야가 아주 멀다. 그 동쪽은 마차산摩嵯山이고, 그 너머는 왕방산王方山, 그 바깥은 화악산華嶽山과 백운산이다. 동북쪽은 환희석대懽喜石臺가 경기와 관서의 경계에 있다. 그 너머는 고암산高巖山으로 옛 맥貊의 땅이다. 서북쪽은 평나산平那山과 천마산天魔山이 있고, 남쪽으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바라보인다. 그 북쪽은 대강大江이다. 오강烏江에서부터 아미蛾湄·호로瓠蘆·석기石岐·임진臨津이 되며, 조강祖江에 이르기까지 100리이다. 조강 서쪽은 옛 강화이다. 강화 서쪽은 연평의 대양이니, 실은 옛 연延
‘상봉上峰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천왕봉이요, 가운데 있는 것은 비로봉인데, 그 사이가 100여 척이 된다. 평지에 서서 바라보면 대궐문과 비슷한 것이 이것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반야봉인데 비로봉과 더불어 두 정상의 거리가 거의 포목 한 필의 길이가 된다. 그 아래는 겨우 일척 남짓 됐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과 같다. 정상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 철쭉이 바위틈에서 소복하게 나와 길이는 일척가량 되고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 쏠려 깃발과 비슷했다. 그 지형이 높고 기후가 차갑기 때문에 풍설에 시달
‘태백산의 봉우리로는 천의天衣·상대上帶·장산壯山·함박含朴이 높고, 강물로는 황지黃池·공연孔淵·오십천五十川이 있다. 태백산 신령 천왕은 황지의 신神이다. 함박은 모란을 뜻한다. 아주 고운 산으로 소뢰현에서 가장 조망하기가 좋다. 장산의 북쪽은 순전히 흙이고 남쪽은 순전히 바위로 보물이 난다. 황지의 물은 줄거나 더하는 법이 없고, 공연에는 용이 있다. 강은 하나의 물 흐름이면서 오십 구비에 걸쳐 있어 오십천이라고 한다.’ - 인용태백산 유산록으로는 거의 유일한 이인상(1710~1760)의 에 나오는
‘연주대는 구름 속까지 우뚝 솟아 있는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 천하 만물 중에서 감히 높이를 함께 다툴 만한 것이 없었다. 사방의 봉우리들은 자그마해서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오직 서쪽에 기운이 쌓여 흐릿한데 마치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자면 바다고 바다에서 보자면 하늘처럼 보일 것이니, 하늘과 바다를 또한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한양의 도성이 밥상을 대한 듯이 바라보였다. 일단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싼 곳이 경복궁 옛터임을 알 수 있었다. 양녕대군이 배회하며 군주를 그리워함을 비록
인왕산仁王山(338.2m)은 한양 도성 안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 기이한 산세로 인해 왕들에 얽힌 숱한 사연,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선비들과 시인묵객들이 음풍농월한 기록, 그리고 지금까지 전하는 청계천·옥류동·청풍계 등의 명칭을 낳고 스토리를 간직한 한마디로 족보 있는 산이다. 그 산을 영화 ‘남한산성’의 주요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던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영수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신비한 샘터를 찾아 올랐다가 기록을 남긴 것이 이다. 그의 후손들이 줄줄이 영의정과
권16 보은현 산천조에 속리산과 삼파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뤄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000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만 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눠
계룡산鷄龍山이 어떤 산인가? 북한산 대신 조선의 진산이 될 뻔한 산이 아니었던가.한 국가의 수도가 될 뻔했으면 분명 명당은 명당이었을 것이다. 좋은 터는 영적인 기운을 필요로 하는 종교단체들에게는 특히 인기였을 것이다. 한때 계룡산 자락 신도안이 온갖 종교의 집산지였던 때도 있었다. 아쉽게도 계룡대 3군사령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100여개 이상의 종교가 모여 있던 신도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군 시설로 대체됐다. 1980년대 중반 계룡대 건립 이후에도 계룡산 신도안에 있던 많은 무속인과 전통신앙인들이 계룡산 곳곳에 흩어져 기도터를
‘대개 오래 있을수록 더욱 기쁘고, 보면 볼수록 시간이 부족하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것과 바꿀 것이 있겠는가? 이 산이 이미 깊고 험한데 이 암자는 높고 또 고요하여 옛 책을 읽기에 적당하다. 내가 만일 항상 거처할 곳을 얻는다면 10년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지만, 장차 열흘이 차지 않았어도 떠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산을 올려다보고 골짜기를 내려다보매, 화창한 봄날의 사물들이 모두 유유자득悠悠自得하니, 내 어찌 깊이 사랑하여 돌아보며 서글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인용 안석경安錫儆(1718~1774)은
‘(주왕산이) 주왕周王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삼한 때 왕의 호칭을 지닌 사람이 이곳에 피난해 산 위에 궁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궁궐 곁에는 폭포가 있고 폭포 속에는 암혈이 있어서 사람이 숨어 지낼 수 있는데, 그 폭포가 은폐하므로 바깥사람이 거기에 굴이 있는지 모르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그 굴에 숨어서 피했다고 한다. (중략) 구경하는 사람들은 일컫기를, 이 산은 계곡이 좁고 시내가 험하며 암벽이 우뚝이 솟아 있고, 산마루는 평평하고 넓지만 사방의 길이 막히고 멀어, 난세를 당하여 군사를 숨겨 적을 방어할 수 있다고
영국 산악인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는 거듭된 에베레스트 등정 실패에도 계속 도전에 나서자 기자들이 “왜 산에 가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그는 지극히 당연한, 그리고 귀찮은 듯 “산이 거기 있으니Because it is there”라고 대꾸한다. 이 네 단어가 지금은 산에 가는 누구나 사용하는 세계적인 명언이 됐다. 이 말은 사실 동양적 가치로 따지면 아무 의미 없는 표현이다.조선 선비들이 남긴 유산기에는 산을 나타낸 수많은 아름다운 표현들로 넘쳐난다. 그중 이옥李鈺(1760~1812)의 에 나타난
‘심광세 의 특징은 변산을 유람하면서 어수대御水臺·화룡연火龍淵·직연直淵·진선대眞仙臺·월정대月精臺·주암舟巖·용암龍巖 등의 기묘한 절경을 그려 화축畵軸·두루마리 그림을 만들고, 그림마다 각각 서敍를 달아 변산의 명소를 상세히 설명했다는 점이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유산록은 심광세 이전에도 많았지만 변산 유산록은 몇 작품 전하지 않는다. 심광세 이 변산 유산록으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심광세가 그렸다는 변산 두루마리 화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그의 도 전문이 아니다. 뒷부분은 일부 빠진 듯
‘이 산(덕유산)의 청고淸高하고 웅장한 경승은 지리산에 버금간다. 그러나 세상일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으면서 죽장망혜竹杖芒鞋 차림으로 유람하는 자들은 반드시 두류산과 가야산만 칭할 뿐, 이 산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선현들이 옛 풍류의 자취를 남겨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토록 하였기 때문인데, 이 산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이 산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사물은 스스로 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산과 무슨 관계가 있겠
‘월출산은 영암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중략) 구정봉九井峰은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
‘지금까지 많은 명산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도 금강산만이 이 설악산과 우위를 다툴 수 있고, 다른 산은 견줄 바가 못 된다. 금강산은 그 아름다움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의 경치는 우리나라 사람조차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무니, 이 산은 산 가운데 은자隱者이다. 내가 세세히 설악의 경치를 적은 것은 고향에 돌아가 친우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요, 또 절경을 찾아 유람하려는 이들에게 알려 주려는 뜻에서이다.’ - 홍태유 중에서 ‘산문기행’ 인용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권혁진 박사는 설악산을 ‘은隱·성聖·기奇·
가야산이 새삼 화제다. 고대 가야의 신화와 유적·유물 때문이다. 가야산은 가야 건국의 시조모 정견모주의 신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하와 혼인해서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왕들을 낳고 가야산의 산신이 됐다고 전한다. 김수로왕의 신화보다 더 오래됐고, 더욱 구체적이다. 우리 고대 역사의 출발점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산이다.가야산에는 한국 불교 삼보사찰 중에 법보사찰의 본산인 해인사가 있다. 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성찰의 최고 경지인 해인海印의 의미도 ‘경전을 열심히 닦고 닦아 그 경지에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嵩山(중악)이나 대산岱山(동악 태산)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을 하고, 옥첩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이산이나 형악(남악)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 창려韓昌黎·주회암朱晦菴·채서산蔡西山 같이 학식이 넓고 단아한 사람이나 손흥공孫興公·여동빈呂洞賓·백옥섬白玉蟾 같이 연단술을 수련하던 사람들이 옷깃을 나란히 하고 뒤따르며, 그 속에서 배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 강정화 교수 ‘김종직 유두류록’ 발췌조선 4대 사화 가운데 최초
‘병풍같이 둘러친 두 개의 절벽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오다가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맑은 하늘에 천둥이 치듯 온 골짜기가 흔들린다. 그 폭포수는 다시 고여 못을 이루며, 이 못은 차가운 거울 같고 깨끗한 옥과도 같다. 주위의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데를 고르려 했지만 찾지 못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 바로 서쪽으로는 한 봉우리가 우러러 보이게 우뚝 솟아 있다. 그 이름을 촉운봉矗雲峰이라 했다. 예로부터 식당암이라 부르던 바위를 비선암이라 개명했다. 골짜기를 천유동天遊洞으로, 절벽 바위 밑에 있는 못을 경담鏡潭이라 하고, 이
‘세 봉우리(석름봉 · 자개봉 · 국망봉)가 8, 9리쯤 떨어져 있다. 그 사이 철쭉이 숲을 이루어, 바야흐로 활짝 피어 있다. 꽃이 한창 무르익어 화사하게 흐드러져 마치 비단 장막 사이를 거니는 듯하다.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매우 즐거웠다. 국망봉 정상에서 술 석 잔에 시 일곱 수를 쓰는데 해가 이미 기울었다. (후략)’ ― 퇴계 에서.퇴계 이황(1501~1570)은 1549년(명종 4) 소백산에 처음 올랐다. 그 감흥을 고스란히 에 담았다. 그게 지금까지 전하는 최초의 소백산